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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l의/↔세상밖Story

탄자니아 2nd : 신과함께, 지구본 연구소

by 문지기Arol 202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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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고향, 탄자니아

가수 프레디 머큐리

 

탄자니아는 연방 공화국,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데 대통령이 2명이 있는 나라입니다. 원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는 별개의 나라였지만, 따로 독립 후에 연방국가로 만들어 하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잔지바르는 인구가 적고 독자적 자치권이 있습니다. 만약 탄자니아에서 잔지바르로 들어간다면 출입국 카드를 다시 써야 하고 황열병 예방주사 맞은 기록을 보여줘야 한다 합니다. 그러니까 잔지바르는 나라안의 나라 같은 느낌입니다. 좋게 말하면 높은 자치권을 갖고 있는 것이고 안 좋게 말하자면 하나로 뭉치게에는 갈등이 남아 있습니다.

 

국회는 단원제이며 국회의원의 수는 393명, 지역구 의원은 264명이고 비례대표는 113명이며 전원 여성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구 의원은 전부 남자일수도 있답니다.) 대통령은 의원을 10명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잔지바르에서 추가적인 5명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또 특이한 점은 검찰 총장이 되면 자동적으로 국회의원이 됩니다. (일방적으로 대통령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랍니다.)

 

탄자니아의 역사를 보게 되면 자체의 탄자니아 역사보다 잔지바르의 역사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잔지바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해안 노예무역의 거점이었습니다. 흑인 노예를 잔지바르 섬으로 데려와 교육 후 아랍이나 인도 상인에 공급하였습니다. 잔지바르는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본토와는 30km 떨어져 있습니다.

 


본토와 30km 떨어진 점은 전쟁시 안전하다는 이점이 있지요. 16~18세기는 포르투갈 점령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가던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초반 오만 아랍계가 들어왔습니다. 오만 술탄 세이드 사이드는 섬 자체가 돈이 되고 기후도 좋아 아예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깁니다. 그래서 1840년부터 1890년까지 50년간 지배합니다. 1890년 영국이 나타나 38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 전쟁을 하고 영국 보호령으로 다스립니다.

 

탄자니아 본토도 1885년부터 독일이 점령하였습니다. 당시는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만들던 시대 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건설에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1885년부터 1916년까지 점령하였는데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원주민 키 몸무게부터 각종 세금 기록을 아주 꼼꼼하게 남겨 현재 동아프리카 연구는 되게 싶게 진행되었다 합니다.

 

 

1916년에 독일 벨기에 영국의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하자 1961년까지 위임통치 형식으로 지배합니다.

 

1961년에 탕가니카라 불린 탄자니아 본토 독립, 1962년 12월에는 잔지바르가 독립합니다. 1964년에 서로 공화국이 되었다가 1965년에 탄자니아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합니다. 탄자니아 본토는 원할하게 진행되었지만 잔지바르는 상당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1964년 잔지바르의 인구를 살펴보면 아프리카계 23만, 아랍계 5만, 인도계 2만 이었던데 인구 20%의 아랍, 인도계가 많은 땅을 차지하였다 합니다. 또한 대향 해 시절에 들여온 정향(향신료)을 수익화하는 과정에서 19세기 초반 아랍계들이 10만의 흑인 노예들을 시켜 정향 농업을 했고 본래는 잔지바르도 농사가 잘 되는 땅이라 식량이 풍부하였지만 정향을 키우는 땅이 많아지자 식량을 본토에서 구해오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잔지바르는 두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잔 비바르는 검은 해안에 검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오래된 지역이라 문화유산이 많은 스톤타운으로 불리는 구시가지도 있습니다.

 

 

아랍계는 주요 토지를 갖고 있었고 이집트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독립 시 이집트가 롤모델이었던 거지요. 1961년 영국은 잔지바르를 떠났고, 선거를 하였는데 23개석 중 12개가 아랍계가 차지하였습니다. 즉 20%의 아랍계가 80%의 흑인계를 누르고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때 폭동으로 70여 명이 사망합니다.

 

 

잔지바르는 1897년에 노예제도가 늦게 폐지 되었습니다. 아랍계는 노골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1963년에 추가 의석에 대해 선거하였는데 요번에도 아랍계의 승리, 그들은 자치 정부를 강화하며 분리 움직임을 내비치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어느날, 참을 수 없던 흑인계는 흑인계 지도자를 필두로 새벽 3시에 봉기를 하여 경찰서, 라디오 방송국 등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 폭동에서 인종 갈등으로 번지기 시작합니다. 이랍계는 숫적으로 열쇠였기 때문에 발발 떨기 시작했고 한 달 내내 폭동으로 많게 보면 2만 명, 적게 보면 4천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이때 이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는데 대부분 아랍과 인도계 사람들이며 이때 탈출한 유명인이 프레디 머큐리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의 가족은 이때 영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잔지바르 공화국에서 탕가니아와 합병, 그리고 탄자니아 연방 공화국이 되었는데 이처럼 아픔이 있었고, 1967년 아루샤 선언을 통해서 인종은 평등함을 강조하였고 사회주의 선언을 하였으며 기업을 국유화합니다.
이로 인해서 초등학교 입학률은 25%에서 95%까지 높아졌고 문자해독률도 10%에서 75%까지 높아지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나 문제는 무리한 집단농장 산업이 생산성 저하가 찾아옵니다.

 

 

그래도 1960, 70년대에는 농산, 광물자원으로 5%의 성장은 유지하였습니다. 허나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1980년 미국 세인트 헬레나 화산 폭발로 냉해가 발생하여 1980~85년도 까지는 1%의 성장도 못하게 됩니다.

 

 

우간다 전쟁이 발발합니다.
71년 이디 아민이라는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 집권하는데 78년 카게라 지역(탄지 나아의 서북부 지역을 우간다의 땅이라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킵니다. 탄자니아의 승리로 끝나며 후에는 이디 아민까지 내치게 됩니다.

 

 

1986년부터는 시장경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1984~86년을 거치며 다당제로 바꿉니다. 탄자니아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잔지바르와의 갈등입니다. 92년도에 탄자니아의 동의 없이 이슬람 협력기구에 가입하려다 큰 반발이 있어 무산되었다가 2008년도에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은 아프리카 대륙에 큰 욕심이 있으며 특히 동해를 낀 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탄자니아에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기계, 의사, 백신 지원 그리고 빚 탕감도 해줬다고 합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중국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유학생을 많이 뽑아가서 중국에서 학위과정을 무료로 수강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중국에 있게 하지 않기 때문에 두뇌유출에 대한 손실이 적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러진 인재들은 나중에 친중인사가 된다고 합니다. 집계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200만 명의 중국인들이 진출하였고 중국인 특징이 주변인들을 많이 데려와 차이나 타운을 이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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