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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l의/↔세상밖Story

아르헨티나 3 : 군부독재가 남긴 참혹한 역사 '더러운 전쟁',아르헨티나

by 문지기Arol 2020.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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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아르헨티나! 시작하겠습니다.
Let's go!!

 

처음은 대향해 시대의 마젤란!!
마젤란이란 사람은 처음으로 세계 일주를 배로 한사람 입니다! 첫시간에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간 최초의 유럽인이라 소개했습니다! 험한 마젤란 해협을 나가면 평화롭지만, 너무 넓었다는~ 태평양이라~~
인도양 돌고 희망봉 돌아서 남아프리카 그다음 유럽까지!!

 

 

보통 마젤란 하면 스페인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원래는 포르투갈 사람입니다. 포르투갈은 대향해 시대를 연 첫 번째 나라!! 그는 인도에 가서, 고야라는 지역을 식민지 삼고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여기서 마젤란은 선장 이었습니다. 인도 주변에서 향료무역을 하였고 그러면서 바다 노하우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7년 정도 있다 보니 월급이 짠것 같아 월급 올려달라 거기에, 플러스 인도 주변만 말고 이 바다(인도양)로 동쪽으로 나가면 인도쪽에서 큰바다가 있는데 그쪽으로 가면 서인도까지 갈수 있을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거기까지 가보겠다고도 하였습니다. 원거리 무역을 할 권한을 달라고 하니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에서 말하길 하던 일이나 잘하라고 하였다는~

 

 

 

그래서 회사 때려치고 라이벌인 스페인으로 갑니다. 나를 도와주면 인도하고 말라카에 있는 향신료를 약속합니다. 스페인은 조약상 인도로 갈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토루데시아스 조약이라는게 있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토 경쟁으로 싸우는 상황이 되다 보니 당시 교황이 중재 하길 아프리카 서쪽 480km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땅 동쪽은 포르투갈 땅이라 중재해줍니다.(토르데시야스 조약)

 

짤라, 대서양 에서 원을 그리다 보면 남미 대륙이 들어 오는데 브라질 땅이 들어옵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 땅 나머지는 스페인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스페인은 대서양쪽으로는 인도에 가기엔 딱 막혀있다 생각하였는데 지구를 반대로 놓고 생각해보면 이건 대서양쪽으로만 그은거니 태평양 방향으로 해서 인도까지 가는건 상관없다 생각하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서인도로 착각하여 탐험을 하였고 그리고, 희망봉을 지나 인도까지 즉,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갔는데 실제로 그 다음에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것을 서인도 제도라는 황당한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마젤란은 인도로 가서 향신료를 가져올수 있는 샛길을 뚫겠다 선언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포르투갈이 알게 됩니다. 향신료는 그당시에 어마어마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다시 꼬셨는데 거절 당합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결속재판을 열어 사형선고를 내리고 마젤란를 잡으러 갑니다. 스페인 왕이 내준 함대를 이끌고 마젤란은 허겁지겁 향해를 시작! 도망을 갑니다. 스페인 함대를 5척 띄었는데요. 함대의 선장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질 않았습니다. 마젤란이 대장 노릇을 해서 결국에는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을 제압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마젤란 해협을 발견을 해서 한달 걸려 빠져 나옵니다.

 

 

 

태평양으로 나오는 순간 내말이 맞았지 ? 했는데 바다 사이즈를 착각 하였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컸지요. 지금 태평양 사이즈 보다 3분의1이나 4분의 1로 착각 하였습니다. 어쩔수 없이 향해 하다가 필리핀 세부로 가서 여기 원주민한테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마젤란)이 일주를 한건 아니고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숨을 거둔 후에, 남은 친구들이 거지골되어 말레카 해협까지 가서 그동안 포르투갈이 독점하던 육두부를 가지고 아프리카 바다를 돌아 가다가 결국 세네갈 앞바다에서 포르투갈한테 뺏깁니다.

 

 

그때 마젤란은 죽었다고 얘기 하였고, 너 갖고 있던거 다 내놔! 거짓골 된 다음에 목숨을 살려줄께 해서 스페인으로 가긴 했습니다만, 스페인 입장에서는 지구 한바퀴를 돌긴 했으나 얻은것 없었습니다. 이 모든일이 2-3년정도 걸린 일 이었습니다. 어쨋거나 그 이후 마젤란 해협이라는게 생깁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작이 1516년인데, 정착의 시작은 15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입니다. 정착 시도로 원주민과 튀격태격하다가 일단 후퇴 하였고, 1580년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580년 부터 본격적 식민지가 되고 페루 총독이 본격적 관리하는 땅이 됩니다. 페루 총독이 관리하기에는 거리상 너무 멀어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별도의 총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은 유럽 중심의 무역을 하였고, 1806년에 영국이 처들어 옵니다. 나폴레옹과 맞서다가 진 스페인은 나폴레옹 입장에 섭니다. 그래서 영국이 화가 나 마음대로 쳐도 되는 땅이라 생각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 합니다. 여기에 있던 식민지 스페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영국군을 격퇴합니다. 영국은 이사실을 믿을수 없고 이상하다 싶어 1807년에 다시 또 쳐들어 오고 또 스페인 식민지 시민들은 격퇴합니다.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던 스페인 식민지 사람들은 아 자신감이 뿜뿜!! 왜 우리가 식민지로 살아야 할까 스페인이 도와준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며 ~ 1810년이 지나 5월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스페인 식민지 체제 무너트립니다.

 

 

 

우리끼리 해보자 하여 1816년에 독립을 선언!! 여러주변 지역들이 거의 독립된 나라처럼 운영되고 있는 상태에서 스페인 치우고 생각해보자 했습니다. 1816년에 독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강력한 나라 원해 중앙 집권제로 가길 희망하였지만 다른 지역들은 밑으로 들어가기 싫어 반대하였고 미국처럼 연방제로 가자 하여 중앙파와 연방제파의 갈등으로 내전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1825년) 브라질과 난데 없이 3년간 전쟁 하였습니다. 그 당시 브라질은 독립한 상태였고 브라질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접경 지역인 스플리티나주를 브라질이 차지 했는데 여기있던 사람들은 스페인쪽에 가깝다고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르헨티나가 개입하면서 양국간 전쟁을 하였고 이지역이 독립하며 지금의 우루과이가 됩니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 전쟁을 치르며 아르헨티나 도움으로 독립했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고 국기도 비슷합니다. 후에 브라질 황제도 물러나면서 남미 지역의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좀 더 나라꼴을 갖추자 하여 1853년에 헌법을 만들고 양원제로 운영하게 되는데 실제로 정식으로 수도도 있고 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립니다. 1880년 정도 되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수도가 되고 본격적 연방제 나라가 됩니다.

 

 

아르헨티나는 기업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조금 더 오래 걸립니다. 아르헨티나 라는 나라는 나라로써 제대로 성장하고 외국인이 들어오게 된 시기는 1870년? 1880년?을 전후하여 아르헨티나는 본격적으로 성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말에 아르헨티나는 팜파스 지역이나 남쪽의 농사 잘되는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약 1300명의 원주민 학살합니다. 이후, 1차 산업의 기초를 닦게 됩니다.

 

 

1880-1890년대까지 아르헨티나 역사상 황금기 였습니다. 50년간 냉장선 냉동선 고기 깡통 통조림 만들어 캔기술도 발달하여 엄청 나게 수출하였고, 1910년, 1911년 이때에는 국민소득이 8위권 이었는데요. 이 정도면 프랑스보다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지고 내부 혼란이라 경제적 위축되었던 시기라 이 지역 부에노스는 남미의 파리(Paris)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외국자본이 엄청 들어옵니다.

 

 

 

광대한 철도망을 건설하여 철도가 여기저기 깔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디토역으로 집중이 됩니다. 당시 얼마나 잘 살았는지 1911년에 남미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만큼 도시화가 이루어 집니다. 도로, 전기, 통신 등이 외국자본에 의해 건설됩니다. 엄마 찾아 삼만리에 나오는 마르코 엄마도 이 지역에 오게 됩니다.

 

 

 

황금기를 보내다가 1929년 대공황 시작은 미국에서 유럽, 그리고 아르헨티나도 영향을 받아 수출 폭락하고 도시 빈민이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엘리트 권위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 요구가 확산되고 또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합니다. 유럽의 나라보나 못할게 뭐있냐 식의 국가주의도 등장합니다. 이게 잘 진행되었으면 중산층 위주 탄탄하게 민주주의가 될 계기 였는데 황금기를 지나서 1차 산업 위주로 돈을 번 기득권과 양극화가 됩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1차, 2차 대전때 중립을 지키며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데, 양극적 극단화로 1930년대 부터 군부가 독재를 시작하게 됩니다. 쿠데타는 아니었고 군부가 자연스럽게 파워게임에서 이겨 통치를 하게 되는 시스템이 등장합니다.

 

 

 

 

1933년, 후안도밍고페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를 에바 페론 남편 이렇게 알려졌습니다. (아내가 예쁘고 그 다음 국민들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1943년, 원래 군부 정부가 있는데 나이 많은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사정부에 대해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때 후안페론이 리더였는데 부통령겸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을 하게 됩니다. 노동자권익보호정책을 강하게 펴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고, 1946년 6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처음엔 쿠데타 였지만 바로 몇년후에 정식 대통령이 됩니다.
(1946. 6. 취임~ 1955. 9. 까지 = 약 10년간 대통령)
이후에, (1973. 10. ~ 1974. 10. 까지 1년 정도 대통령을 한번 더 합니다.)

 

 

 

후안페론(1885. ~ 1974.)
어머니는 숨기고 싶었지만 원주민 계통이었습니다. 1911년부터 군인생활을 하였는데 잘한것 같아요. 승진이 차곡 차곡 되었다가 이탈리아에 있는 아르헨티나 대사관 파견도 나가며 당시의 무솔리니 파시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파시즘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당시에는 매력적 이었습니다. 왜냐면 민주주의도 혼란스럽고 공산주의는 아닌것 같고 한 사람들한테 파시즘 일사 불란 효율적이며, 국가가 서민들 보호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히틀러도 무솔리니한테 배운거예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람들한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기차가 정시에 다니고 이런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는 무솔리니가 만든거라 보시면 됩니다. 밀땐 밀고 발굴할건 발굴하고 지금의 로마가 됩니다.

 

무솔리니가 로마를 바꾸기 전에는 말라리아 전치에 덥고 무덥 지대 였습니다. 당시에 무솔리니가 인기가 많아 당시 유럽 지도자들이 파시즘에 영감을 받게되고 어떻게 보면 히틀러도 결국 국민 투표로 당선된 사람이니까요.

 

 

 

후안페론이 유럽에서 돌아와서 동료들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노동부장관이 됩니다. 그 이후에 그는 노동 조건 개선합니다. 왜 갖은 있는 놈들만 잘살고 대부분 노동자들은 못살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등 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 확보를 받았지만 but, 토착 지주나 외국자본가들은 싫어합니다.

 

 

대통령 선거 전부터 후안 페론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페론주의가 등장하는데요. 이게 뭐냐?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자료에서는 이 페론주의를 국가적 온정주의라 해석하고 그것을 보통 국가가 자유롭게 자식들은 잘 돌봐주는 대신 자식들은 국가에 대해 잘 따라주는~ 그런건데요.

 

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보면 첫번째로 중앙정부가 강해야 한다. 두번째는 외세로 부터 독립! 인데 이것은 남미국가의 특징입니다. 세번째는 자본 사회! 독자적 민족주의가 가미된 이런 노선 입니다.

 

 

페론은 사회정의란 말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뭐냐면 노동 조합에 대해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양보를 대신 노동은 국가의 종속적 존재로 들어오게 됩니다. 서로가 타협하되 싸우지는 말고 우리가 싸울 상대는 돈많은 외판 자본가들이지 민족열망으로 세워진 국가와 노동자들은 싸우지 말자 입니다. 즉! 포퓰리즘, 개인 숭배, 시민의 국가 존속 이 어울어지고 여기에 파시즘 요소가 붙여집니다.

 

 

 

 

사실 페론이 순탄하게 대통령을 한것은 아닙니다.
1943년, 쿠데타를 일으켜 1945년에 동료에 의해 빵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인기가 좋았으나 동료들이 그의 인기를 두려워 합니다. 그러고 여기서 그 유명한 에바페론이 등장하는데요. 그녀는 방송에 가서 우리 남편이 갇혔습니다. 국민 여러분 도와주세요. 그러면서 유명해지기 시작 합니다.

 

 

 

이후 국민적 석방운동이 일어나고 결국은 에바 페론 덕택에 남편 후안페론이 풀려나게 됩니다. 후안페론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아프헨티나를 세계 최고 국가를 만들겠다 약속합니다. 수입대체! 산업화! 철도! 많은 것들을 국유화하고, 부정 부패 척결, 노동자 임금 20% 인상 등 파격적 대우를 합니다. 1946년에 모든 외채 상환까지 한 페론 정부는 모든지 할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IAPI(곡물국영기업)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모든 곡물 수출은 이 기업을 통해서 하였는데 이 기업의 이윤을 공공으로 쓰게 됩니다. 이 회사는 국가에 돈 국민들이 필요한 돈도 대출해 주고 아르헨티나가 3년 사이에 25%가 성장하는데 이 와중에 돈 있으니 학교 병원 등 건립하게 됩니나. 국민한테는 당연히 인기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그러면서 페론이 "너 대통령 계속해라! 6년만 하는거 아니다!" 하는 헌법을 개정(1948년)을 하고, 대통령중앙집권제가 되면서 언론은 부패하고 페론 부부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에바페론은 이 와중에 소외곤 계층을 위해 전략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디오 영화 신문을 통해 보여주는데요. 하나같이 안아주고 울어주는 모습! 서민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붙게 됩니다.

 

 

 

 

모든게 행복하면 좋은데 문제는 돈입니다!!
1940년대 후반되면서 곡물가격이 하락이 시작합니다. 그러니 퍼줄 돈이 부족하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미국이 페론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파시스트라면 기겁을 하는 미국이 후안페론을 보니 하는짓이 개인 우상주의! 그런걸 보면서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라 규정하게 됩니다.

 

 

미국의 마셜플랜 원조를 받은 유럽한테 미국은 남미에서 식량을 사지말라고 합니다. 살거면, 브라질까지는 봐줄께! 아니면 미국에서만 사! 하며 미국이 유럽한테 압력을 넣습니다.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큰 시장을 잃고 이때 1949년 부터 무역적자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몇년간 이어지니 고물가에 실업이 증가하고 흔히 말하는 스테크 플레이션 발생합니다.

 

 

 

그리고, 1952년에 에바페론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33세의 나이에 죽게됩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국민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녀가 죽고 페론 대통령은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하는데요. 정책 전환은 그전 부터 생각이 있었는데 에바 페론 때매 못하고 있었습니다. 에바 페론은 국민들에게 계속 해줘야 된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구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어길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후 에바페론 노선에서 벗어나 친자본 정책으로 변화 하였습니다. 일단은 외화를 가져와야겠다 생각하여 외국 자본 유치하고 석유, 자동차 등을 가져옵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게는 계속 고임금 줘야된다 했지만, 사실은 이게 잘 안됩니다. 결국 경제 혼란이 생기고 1955년에 이혼을 법안 제정 추징 과정에서 가톨릭이 강하게 반발하는데, 군부가 그것을 핑계로 "처음엔 잘하는것 같다가 잘 안되니 책임지고 나가라!!"

 

 

 

 

1955년 9월에 쿠데타로 페론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가게됩니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아르헨티나는 복잡한 상황을 겪다가 1972년에 "돌아오세요!!" 라는 국민 여론이 높아지게 됩니다. 1972년에 22년만에 스페인 망명 생활을 뒤로하고 돌아오고, 1973년에 페론은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고, 그의 세번째 부인인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지목합니다.

 

 

 

 

이후 정치를 잘 했으면 좋았겠으나 하필 오일쇼크가 발생하여 원래 몸이 안좋던 상황에서 1974년 7월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사벨이 승계를 받았으나 경제위기가 지속되어 퇴장하게 됩니다.

 

 

 

페론하면 흔히들, "포퓰리즘", "퍼주기", "나쁜놈" 이렇게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 아르헨티나를 생각해보면 국가채무도 없고 안정적으로 곡식팔고 돈도 잘 들어와서 농민들하고 그동안 고생한 사람에게 국가가 뭐 좀해줘야 해 세계 랭킹 10위의 국가가 배고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말이 돼? 뭔가 상황이 안 맞아서 국가가 힘들어 진걸꺼야!!

 

 

아르헨티나 국민에겐 그 시기가 여전히 황금시기 입니다. 국가 라면 퍼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국민들은 페론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이자벨 페론이 집권하던 1976년에 쿠데타가 벌어지는데 이때의 쿠데타가 아르헨티나의 막장의 시작이 됩니다. 문제는 이 정도가 매우 심해 좌익 인사와 노동운동가를 대상으로 활동 억제 정도가 아니거 납치 고문 살해를 합니다. 광범위하게 하는데요. 자국민을 대상으로 아주 못된직을 오랫동안 합니다.

 

 

 

이 와중에 1978년 부터 80년 사이 금융 무역 자유화 등의 외채가 확 늘어나고 위기를 겪다가 1982년에 포클랜드 전쟁을 겪으면서 쿠데타 세력이 물러나게 됩니다. 포클랜드 섬은 영국령인데요.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자기 앞에 있는 섬입니다. 아르헨티나가 기습 점령을 합니다. 원래 영토 분쟁이 있긴 한 섬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위기 상황에 몰리니 시선 다른데 돌리기 위해 점령을 한건데요. 당시 영국 대처 정부가 안좋은 상황이라 전쟁 안 할것 같아 저질렀는데 결국 망한거죠.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더러운 전쟁이 가장 고통을 가져다 준 시기입니다. 1976-1982년 사이 6년 동안 고문한 사람 40만명 이고, 살해는 10만명 입니다.

 

 

하다 하다가 사람들을 강에다 던지고 사람들을 줄줄이 묶어 돌멩이 매달아 대서양에 던지는 이런일이 매일 일어납니다. 마구잡이로 채포하고 고문하고 재판없이 살해 당하고 여성들 같은 경우는 성고문 ㅡ 일부로 임신을 시켜 아이들을 출산~ 엄마는 살해!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은 친정부 성향의 가정에 입양을 시킵니다.

 

 

 

이런 일을 자행한 명분이 CIA가 뒷받침 되어,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공동으로 즉 독재국가 자파 척결을 목표로 각국이 이런일을 했습니다. 그중 아르헨티나가 가장 심했습니다. Crazy한 학자가 "공산주의는 정신병이다! 한번 물들면 빼내기 힘들다! 여기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 들을 국가적으로 잘키워야 한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이런 집안에 보내 키워야 한다!" 주장했습니다.

 

 

 

되게 황당한 일이지만 1980년대에 일어났고, 우리나라도 일어났습니다. 힘들었지만 아르헨티나가 꽤 사는 나라 였는데 이런일이 일어났습니다. 약 30만에서 200만명이 탈출 시도하다가 많이 죽기도 했습니다. 더러운 전쟁에 대한 상처가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는데요. 연좌제 실시하여 누가 잡혀 들어가면 가족 이런 사람들은 공직에 관련된 직업은 갖을수 없게 됩니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를 둘러싼 과거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문제! 경제 문제와 포클랜드 전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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